11년이 지나서야 돌아온 땅이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새롭다거나 혼란스러운 느낌은 없다. 속타고 아픈 사연을 온라인 매체를 통해 경험하다, 거리의 얼굴에서 직접 느끼는 것이 다를 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옛친구를 만나는 기쁨 못지않게 두고온 정들이 발길을 묶는다. 마스크를 쓴 채 운동하는 사람들 틈에서 신선한 아침공기에 대한 유년의 아득한 기억을 떠올리기에 내 머리는 너무 늙어버렸다. 이렇게 적응하는 것이겠지... 매연과 끈끈하게 엉키어 살아가는 저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내 생활의 뿌리를 내려본다. 힘! 내보는 거다.

2주일이 넘도록 열어보지 못한 RSS 리더기에는 수많은 '피드'들이 쌓여있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몇몇 독일인들에-이들의 정체(?)는 후술- 의해 만들어진 '인터넷 선언문'이다.

이 선언문의 배경을 간략히 설명하고, 짧은 평을 시도해 본다.

배경 1: 하이델베르크 호소와 함부르크 선언
이번 '인터넷 선언문'이 나온 배경은 두가지다. 하나는 독일 및 유럽의 작가, 학자, 그리고 언론사 및 다양한 미디어 기업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구글의 '지적 재산 도둑질'을 비판하자, 이에 대한 반론으로 선언문이 탄생했다. 두번째는 지난 9월 12일 유럽 여러 도시에서 있었던 'freedom not fear'라는 데모의 사전 행사 성격을 선언문은 가지고 있다.
전자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올 3월 말,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모인 (노년의) 작가들과 학자들은 이른바 '하이델베르크 호소문' (
원문 보기)을 통해 200여년 이어져 내려온 저작권법을 보다 강력하게 인터넷에 확대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호소문에 대한 독일어 위키 보기). 호소문의 주적은 '구글 북스'다.

그리고 지난 7월 초 독일 함부르크에 보인 600여 유럽 언론사 및 출판사 대표는 '구글 뉴스'를 주적으로 하는 '함부르크 선언'에 동참한다(함부르크 선언 영어 원문 보기). 선언의 핵심은, 열심히 일한 것은 자신들인데 그 과실을 모두 따먹은 것은 구글 뉴스라는 것,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것, 하여 정치권이 나서라는 것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역시 가공했다. 유럽연합 집행위가 이 문제를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고, 9월말 총선-의원내각제인 독일에서 총선은 바로 대선을 의미-을 앞둔 독일 각 당 후보들은 이들 언론사 대표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이 두 가지 호소문과 선언문에 대한 찬반 토론이 신문지상과 온라인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일 인터넷 선언'이 탄생했다.

배경 2: 아동 포르노 검열을 반대하다
트래픽 및 방문자 통계에서 세계 5위권 사이트에 속하는 youporn.com을 독일에선 합법적으로 접속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검/경찰 당국이 비타협적으로 추적/검거하는 행위는 이른바 '어린이 포르노 (영어 위키 보기)' 제작, 유통 및 소비행위다. 여기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문제는 '어린이 포르노'가 인터넷을 통해 유통 및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막기 위해 독일 여성부장관은 2009년 초 '모든 인터넷을 실시간으로 검열'하여 '어린이 포르노'의 확산 및 유통을 막겠다고 선언하였고, 관련법이 지난 6월 독일 연방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독일 전체 인터넷 사용자의 0,01% 규모에도 못 미치는 어린이 포르노 유통업자 및 소비자를 잡기 위해 전제 100%를 실시간 감시하겠다는 어마어마한 법이다. 이 법 제정에 반대하는 거센 저항이 온라인을 통해 조직되었고, 급기야 독일 해적당이 창당되면서 반대흐름은 거리로, 선거운동으로 이어져 갔다. 그 흐름 가운데 '인터넷 선언'은 위치해 있다.

비판 1: 감동이 없는 선언문
그럼 비판을 시도해 보자. 첫째, '선언(manifest)'의 감량이 떨어진다. 선언이라함은 모름지기 역사적 흐름을 읽어내고, 선언 발의자들이 생각하는 세상에 대한 그림을 가능하다면 감동적으로 전달했어야 했다. 이러한 '감동'이 빠진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선언문이 마치 '컨설팅'용 발표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발의자들의 면모를 살펴보자.  Mercedes Bunz는 규모있는 베를린 지역신문 온라인 편집장으로 일하다 최근 영국 가디언으로 직장을 옮긴 박사급 여기자다. Thomas KnüwerJeff Jarvis를 능가하는 독일 미디어 전문 블로거다. 아니 그의 본업은 독일 최대 (보수) 경제일간지 '한델스블라트'의 인터넷 전략담당 기자다. Sascha Lobo는 기자이면서 -사실 기자는 그만 둔 것 같다- 미디어 관련 컨설턴트로 일한다.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자랑하는 그는 최근 영국 이동통신사 '보다폰' 광고에도 직접 출연하며 이른바 '블로거 세상'을 선포하기도 했다. 다음 Robin Meyer-Lucht. 박사급 미디어 컨설팅 회사대표다. 독일의 '허핑턴 포스트'를 만들겠다며 그가 만든 팀블로그 Carta는 일부에서 '컨설턴트들의 자기 PR장'으로 비판받고 있다. Mario Sixtus는 독일 '비디오 케스팅'의 선구주자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제2공영방송의 인터넷 전문가로 고용되었다. Stefan Niggemeier는 독일 최고의 비판 블로거이자 이른바 파워블로거(2년 연속 전체 순위 2위)다. 전직은 '전업 기자', 현직은 블로거이자 각종 언론 '자유 기고가'다. 아마 발의자 중 유일하게 사회적인 비판글을 많이 쓰는 사람일 거다. 그렇다고 이들의 경력이 문제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문제는 선언문의 깊이가 없다보니, 선언문이 그들의 경력에 기초한 '산업 지도'쯤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비판 2: 인터넷의 성격은 이를 만들어 가는 자들의 몫이다
인터넷에서 '자유'는 자연발생적으로 '불가침'한 그 무엇이 아니다. Andrew Dubber의 "The Internet was not made to make money. It was made for people to communicate"라는 말은 인터넷 탄생을 설명하는 정말 멋진 표현이다. 그러나 현재 인터넷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돈을 버는 기업과 사람'이다. 이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 주도아래 인터넷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음이 우려스럽다. 그들은 정치권, 법조계, 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들 중심의 인터넷 세상을 착착 빠른 속도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인터넷 사용자의 자유.
이것은 이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피나게 싸워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어렵게 지킬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독일 인터넷 선언문에는 안타깝게도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리고 이를 갈망하는 '사람'이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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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강정수 @npool

2009/09/19 23:13 2009/09/19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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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터넷 선언: 오늘날의 저널리즘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한국어판)

    Tracked from capcold님의 블로그님 2009/09/20 00:22 Delete

    !@#… 최근, 독일의 지명도 높은 블로거 – 예상할 수 있듯 대부분 정치/사회/기술 관련 – 들이 모여 오늘날 저널리즘과 정보의 지향점에 대해 17개 항목을 뽑고 09년 9월 9일자로 ‘인터넷 선언’이라는 거대한 제목을 붙여 성명으로 발표한 바 있다(via 몽양부활님 트윗). 그런데 이들의 인식틀이나 주제가 capcold와 공명하는 바가 있어, 이번 기회에 한국어판을 만들어 공개하고자 한다. ...

  2. 민노씨의 생각

    Tracked from minoci's me2DAY 2009/09/20 06:35 Delete

    초강추 : http://npool.ktpage.net/166 (강정수, 09.9.19.) : 1. 인터넷 선언의 맥락. 2. 껍질(컨텍스트)와 알맹이(텍스트)는 항상 서로 불가분이다! 3. 후속글이 무지무장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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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노씨 2009/09/20 06:27 # M/D Reply Permalink

    안 그래도 관련글 안쓰시나 기다리던 참입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 )
    그리고 말씀하신 취지에 전폭적으로 공감하면서, 맥락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추.
    1. 지난 모임 논의들도 조금씩 정리해갔으면 좋겠습니다.
    2. 이 글의 후속글도 준비중이신가요? 물론 1의 연장이면서 겹치는 부분도 없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지만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

  2. 2009/09/22 20:10 # M/D Reply Permalink

    마치 국민들의 열망 없이 정치권이 제 맘대로 개헌논의를 진행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대중의 자발적 열망이 전제가 돼야 정당성과 진정성, 감동이 나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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